
제갈량이 오장원 들판에서 숨을 거두자 촉의 하늘은 한동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나, 그 투명함은 오히려 빈자리를 가차 없이 드러냈다. 성도 궁정은 검은 비단으로 현관을 가리고 백관이 삼일 동안 곡을 멈추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소리 없이 논두렁을 돌며 다음 추수를 준비했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한 씨를 뿌려야 했고, 기름에 절인 등잔은 여전히 밤을 밝힐 연료가 필요했다. 유선은 흰 상복에 떨리는 손으로 조서를 내렸다. 강유와 장포, 동년배인 등지가 군권을 나누고 황호·첩기 같은 어린 문관들이 새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촉의 실질적 작전 설계는 제갈량의 유지를 품은 강유에게 일원화되었다. 강유는 북벌 대의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촉의 작은 산악 전장에 맞춰 민병제를 강화하고, 목우유마를 손질해 더 가벼운 죽마차로 개량했으며, 전투마다 현지 조달을 철저히 제한해 진을 깊게 파지 않았다. 매년 봄이면 그는 금성 북문을 나서 구곡도를 거쳐 기산과 탕곡을 차례로 두드렸고, 여름 장마가 닥치기 전엔 반드시 군을 돌렸다. 이 “봄가을 출정”은 위군에겐 모기를 쫓는 연기 같아 보였지만, 강유는 벼락처럼 틈을 고르고 있었다.
반면 위나라에서는 사마의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권신들을 압도했다. 그는 고평릉 쿠데타 이후 군권과 조정을 함께 움켜쥐고 좌우에 현량과 유순을 두어 근신을 감독했으며, 조상전(曹爽典)이라 불리던 옛 정파를 뿌리째 도려냈다. 사마의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 사마사, 차남 사마소, 그리고 조카 사마주가 권력의 톱니를 맞추며 움직였다. 조예는 정무에 개입할 의지가 없었고, 환관과 후궁 집단은 사마씨의 시선을 피해 몸을 낮추었다. 이 틈에 사마사는 대사마가 되어 북방 선비족과 오환을 토벌했고, 사마소는 도성 치안을 장악하며 중군 권한을 확립했다. 위나라의 행정은 겉으론 팽배했지만, 조씨 종실과 사마씨 친족, 그리고 지역 군벌 사이의 불안이 깊게 고여 있었다.
손권이 건업에서 황제 즉위를 선포하자 강동은 일견 화려해졌다. 장강 하류에는 신항만과 사신 전용 부두가 생겼고, 무창과 회계에서는 철과 소금이 넘쳤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태자 손등이 일찍 요절한 뒤 황위 서열이 가물거렸다. 손권 말년엔 손패・손휴・손량이 번갈아 태자책봉을 놓고 다투었고, 섭정 손준・손침 두 종친이 왕실 권한을 휘어잡았다. 주유와 노숙이 남긴 온건 세력은 밀려났고, 여몽・육손 계열 무장도 번갈아 실각·복권을 반복했다. 강동 백성은 “물길은 넓어졌는데 뱃사공이 자꾸 바뀐다”고 혀를 찼고, 세금이 늘어나자 농가마다 버드나무 울타리에 헌 솥을 걸어 놓으며 불만을 숨겼다.
사마소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형부와 비밀 군령을 돌려 영천·낙양 일대 병참창을 확충하고, 옛 조조 방식을 본떠 둔전과 가축 사육을 군단 내부에 병행하도록 했다. 북방 요지 세 곳―옹주, 병주, 기주―에 둔전병을 대량 파병해 말을 길렀고, 장합 휘하에 있던 종회·등애를 발탁해 신식 공성 장비 연구를 돕게 했다. 종회는 수례형 쇠뇌와 “비마진”이라 불리는 장간 투석기를 개량했고, 등애는 물길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판옥선형 부교를 설계했다. 이 장비들은 본래 강동 공략용이었으나, 강유가 매년 기산을 건드리기 시작하자 군부의 시선이 서남 산악으로 옮겨갔다.
강유는 여섯 차례 출정 끝에 위의 국경선 후방을 깊숙이 파고든다. 특히 성도 건흥 13년 출정에서는 무도 서쪽 도강에서 종회군을 급습해 진창·도마 가도를 소각하고 보급선을 틀어막았다. 위연의 전술 유산을 물려받은 강유는 급류 속에서 배를 잃는 대신 산등성이를 따라 야간 기습을 선택했고, 이는 한때 낙곡에서 종회 본진을 위협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촉군 대다수는 장거리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구거에서 맞은 혹한에 얼어붙고, 위군은 종회의 지시로 방어 라인을 좁히며 겨울을 버틴다. 강유가 남하하자 위군은 즉시 반격을 가해 한 번에 오십 리씩 추격했고, 강유는 제갈량이 생전에 설계해 둔 익구 연속 방진으로 간신히 철군한다. 강유의 연전연패에 피로는 누적되었지만, 기여한 병사들에게 논 두렁을 떼어 주는 ‘분전제’ 덕분에 촉 병사들은 여전히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성도 조정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웠다. 궁중 환관 황호가 유선의 총애를 업고 재물과 관직을 팔아 치웠고, 내시 가문의 친척들이 지방 행정과 공작물을 독점했다. 강유는 상소마다 황호를 탄핵했으나 묵살되었다. 유선은 “전쟁이 잦아 창고가 비었으니 황호가 기강을 세우는 것은 꼭 나쁜 일이 아니다”라고 회신했고, 강유는 한숨만 깊어졌다. 촉의 상비군은 12만으로 줄었고, 매년 차출되는 보조병조차 호적 장정을 채우지 못해, 금산·장안 등지에서 도주민을 사면해 모병하는 방식을 써야 했다.
이 무렵 위에서는 사마소가 병으로 쓰러지고, 아들 사마염이 권력을 넘겨받았다. 사마염은 귀족 출신답게 부드러운 얼굴과 달리 냉정했다. 그는 즉위 초 “왕조 개창보다 천하 통일이 먼저”라고 선언했고, 숙부 사마주와 함께 군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사마염은 수도를 낙양에서 뤄양으로 고정하며, 황하·낙수·위수 삼각 병참망을 대규모 재정비했다. 관중 곡창은 다시 금곡창에 세 배 규모로 확장됐고, 수레꾼만 오천을 넘었다. 이런 준비 속에서 강유의 아홉 번째 북벌이 시작된다.
강유는 이번엔 직접 한중을 비우고 검각에 대규모 토성을 쌓아 속공 유도전을 펼친다. 위연의 옛 부장이던 장익이 서선을 돌파해 도마도까지 진출했으나, 종회와 등애가 동시에 역공에 나섰다. 등애는 음평 고개에서 겨울 눈 속을 뚫고 들어가 검각 뒷길을 차단했고, 종회는 한달음에 기산을 내려와 촉군 본영을 압박했다. 강유는 가공할 속도로 검각을 버리고 음평 수비를 강화했으나, 장익이 이미 퇴로를 잃어 상규곡 전역에서 참패한다. 그해 겨울 촉군은 국경선 안쪽까지 밀려나고, 강유는 정신없이 철수하면서도 버려진 백성을 실어 나르느라 군량이 바닥났다.
이제 위 조정은 결단을 내렸다. 사마염은 종회・등애 연합군 18만을 서남 침공군으로 편성하고, 횡단 기간 단축을 위해 “양도출정”이라는 이원 전략을 승인했다. 종회는 대로를 따라 한중·양평관·검문도로를 정공하고, 등애는 은밀히 음평 산맥 서쪽으로 돌아 높은 설산을 넘어 촉 후방을 들이친다는 계획이었다. 출정 명분은 “강유 토멸과 한왕 유선의 영접”이었다. 종회는 출발과 동시에 가도수리지계를 맹렬히 뻗어 260여 리의 산길을 나무판자로 덮고, 등애는 건흥 예전 제갈량이 쓰다 만 험로 약도를 받아 연구했다. 사람들이 “천하가 끝날 즈음 마지막 전쟁이 산맥에서 터질 것”이라 수군댔다.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방해로 국경 정세 보고가 늦어져 위군의 대공세를 뒤늦게 파악했다. 그는 장포·동윤을 돌려 음평 방면을 수비하고 스스로 검각 전선에 매달렸지만, 종회의 공성구는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었다. 검각 석벽을 괴는 돌격탑과 쇠뇌 수레가 쇠비수를 쏟아내자, 촉군은 열흘 만에 성문 두 층이 무너졌다. 강유는 불지를 틈도 없이 후방으로 퇴각하며 “전략 초점이 음평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평에서는 이미 눈보라가 산맥을 덮었다. 등애가 변장한 군교 수백을 이끌고 하늘길 같은 상산로를 넘어와, 가느다란 사람 사슬로 절벽을 기어내리며 노군현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노군현은 콩 볶는 냄새만 남기고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등애는 병력 삼만을 세 갈래로 쪼개 직접 기산으로 내려가지 않고, 진창 서남 하구를 돌아 성도로 내달렸다. 그는 침하강 도하 지점에서 짚신을 벗어 발을 씻고 “물은 차지만 내 뜻은 뜨겁다”고 외쳤다. 성도에 황호가 파견한 총관은 등애가 도성보다 먼저 온다는 소식에 공포에 질려 성문을 닫았다. 강유는 먼 길을 돌고 돌아 검중계곡 천패관에 최후 방진을 세웠으나, 종회가 이미 뒤를 쳐서 굳힌 상태였다. 촉의 두 전선은 그믐달 같은 곡선으로 끊겨 있었다. 결국 등애가 성도 남문에 도착한 이튿날, 유선은 궁녀와 어린자제를 데리고 나와 투항 문서를 바쳤다. 그는 “백성이 전쟁에 타 죽기보다 나라가 무너지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촉 한실은 이렇게 263년 늦가을, 비 내리는 돌계단 위에서 막을 내렸다.
종회는 성도에서 등애와 공로를 다투다가 갈등을 키웠다. 그는 강유를 포섭해 등애를 제거하고 촉 땅을 근거로 독자 정권을 세우려 했으나, 강유는 가장 깊은 곳에서 촉 제후의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종회의 계획을 빌려 서조 수비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듯하다가, 밤을 틈타 등애와 종회를 동시에 함정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위군 내부의 불신과 양측 병사들의 공포가 엉켜 결국 강유와 종회, 그리고 등애 모두 죽음을 맞는다. 혼돈의 칼날이 성도 북문을 두 번 넘나드는 사이, 민가 담장은 부서졌고 장터의 짚곰방대는 흙바람에 날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사마염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고 “천하는 이제 두 집안만 남았다”고 선언했다. 즉 위와 오, 그리고 머지않을 진(晉)이다. 그는 고위 귀족과 논공행상을 마친 뒤, 태시 원년 스스로 진왕에 오르며 칭제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북방 유목 세력이 잠시 조용했고, 내남방 산월 또한 강무행정에 눌려 반란 기운이 사라졌다. 강동은 손권 사후 손휴・손호 형제가 번갈아 즉위했으나, 황제 손호 때는 폭정과 권신의 대립으로 궁궐 담장마다 피비린내가 배었다. 태복부 수장 도황이 가계 곡식을 끌어다 장강 건너 밀거래를 벌였고, 구강·회계 사이에 선박세가 세 배로 뛰자 상인들이 멀리 양자강을 피해 서남 내지로 떠났다.
위·진 조정은 이 모든 균열을 기록해 두고 있었다. 사마염은 낙양에서 대대적 태학 박사 선발을 시행하며 문인 귀족들의 충성을 얻고, 종실을 회유하듯 연회를 열어 조씨 후손에게 백은과 비단을 나눠 주었다. 겉으론 대범했지만, 안으로는 도성 주변에 오백 사찰을 헐어 군영을 만들고, 철제 투석기 주형을 이십 이종으로 확대했다. 또한 옛 촉 땅에 진서・건위 두 대도독부를 설치해 강유 잔당의 재기를 막는 동시에 회남・양주 방면으로 병참로를 달았다. 이 모든 움직임 뒤에는 오정벌, 곧 강동 공략 최종전이 시야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지 6권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오나라가 강모를 휘감고 푸른 물결 위에 마지막 설탕처럼 녹아 내리기 직전, 촉의 불꽃은 이미 재가 되었고, 위는 진으로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끝냈다. 천하를 흔들던 영웅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늙었고, 새로운 세대는 피로 물든 깃발이 아닌 행정 문서와 병참 노선 위에서 전쟁을 완성하려 했다. 그러나 칼날이 닳은 자리를 대신해 쇠사슬과 돌격탑이 빽빽이 들어서고, 강물엔 구리 철갑을 덮은 전선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소방울을 흔들며 손바닥에서 팥을 굴렸지만, 그 웃음 너머로는 궁궐 담장을 넘어오는 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승리와 패배, 정의와 배신이 뒤섞인 피로 물든 바람이 또다시 남쪽으로 불어갈 태세였다. 그리고 역사는 그 바람 위에 다음 두 글자를 조용히 새기고 있었다. 통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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